티스토리에 새 블로그를 팠다. 잡담

http://philomenabin.tistory.com/

당분간은 이글루스에 머물러 글 계속 쓰겠지만, 
티스토리가 진지한 글 쓰기엔 좋은 사이트 같아서 그쪽에 블로그 하나 만들었다. 

왠만한 글들은 두 블로그에 다 올릴 계획이다. 다만 몇몇 글들은 한쪽 블로그에만 올릴 수도 있다. 

내 블로그를 보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공지를 해 본다.

요즘 사회비판들 보면서 불만인 것 잡담

바로 사실만 나열해도 충분히 깔 수 있는 사안을 
왜 굳이 과장,왜곡 심지어 조작하면서 까는 풍토다.


한국 노동시간 긴 거 솔직히 사실이다.
실업난에 시달리는 청년들이 취업 쉽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 없었던 80~90년대를 그리워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여자라는 이유로 겪는 불합리한 불이익이 있는 거 맞다.
한국 자살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한국 현역병에 대한 처우 솔직히 너무 열악하다.

이런 테제들은 통계와 사례들로도 충분히 도출해 낼 수 있다. 
이런 사회문제들 비판하는 덴 공개된 자료만으로도 깔 거 무궁무진하다.
신빙성 있는 근거로 충분히 설득력을 갖고 비판할 수 있다. 
이렇게 까도 사람들 많이 공감할 것이다.


왜 이런 문제들을 굳이 과장, 왜곡, 조작하면서까지 까야하냐고.


외국엔 장시간노동이나 야근이 '아예 없다'고 하질 않나.
현재 생활 수준이 80/90년대보다도 낮다고 하질 않나.
한국의 여성인권이 인도보다도 낮고, 임금격차 36% 전부를 '단순히 여자라는 이유로 덜 받는다'고 해석하질 않나.
한국 자살률이 높은 걸 청년 실업으로 해석하질 않나.
타 징병제 국가들은 죄다 최저임금 맞춰주고 병영부조리가 없다고 하질 않나.
(참고로 위 다섯 주장은 모두 '확실히' 틀렸다)


더 웃긴 건 저 주장들의 과장, 왜곡, 조작을 지적하면 
'저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쓰잘데기없는 트집이나 잡는 놈'으로 취급한다는 거다.
그리고 내 의도를 왜곡한 맹렬한 비난들이 이어진다. 
심지어 나는 저 주장의 큰 틀에는 동의하는 사람인데도 비판을 거부하는 셈이다. 


아마 주장을 자극적이고 주목 잘 받도록 만드려고 이러는 것 같은데.
과장, 왜곡, 조작이 일상시되는 풍토는 비평의 수준을 낮춘다.
어쨌든 당신들이 이야기한 건 '사실'이 아니게 되니.
그러다보니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에 대한 논쟁이 아닌,
주장의 사실성에 대한 불필요한 논쟁만 촉발시킨다.

원래 사회 비평의 의도와는 백만광년 멀어진 반응이다.
이것이 당신들이 원하는 반응이었는가?


요즘 사회비평 글들은 이런 식의 글들이 너무 많다. 
심지어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이딴식의 헛소리를 자꾸 접하다보니 점점 짜증이 쌓인다. 

당신들의 과장, 왜곡, 조작하는 태도는 사회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발 자중하길 부탁한다.

한국 지식인들이 자국을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 학문적 이야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한국을 우습게 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었다.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식은 거칠고 소홀하며 허위에 가득 차 있고 태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국의 역사에 대해서조차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대상(=한국)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국을 분석하는데 당위와 연역과 도덕과 외과수술적인 언설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내재적으로 자국을 이해하려고 하는 소수의 성실한 언설은 부당하게 무시되거나 경멸되고 있었다.


- 오구라 기조,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조성환 역, 모시는 사람들, 2017, p.251-252


이 점에 유의하면서 한국의 (경제학, 사학) 연구자들이 보이는 공통의 결함을 지적하자면, 그들은 한국의 경제체제를 제약하고 있는, 그것의 비교적 특질을 깊숙이 각인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비공식적 제도와 규범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적절한 관심조차 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중략)... 한국경제의 유형적 특질에 대한 국내의 논의가 경험적이라기보다 규범적이며, 전체적이라기보다 부분적이며, 심층적이라기보다 표피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음도 이 같은 이유에서이다. 


- 이영훈 엮음, 『한국형 시장경제체제』,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 p.25


(자칭) 지식인들이 쓴 한국사회 비평을 보면서 한숨나왔던 적이 많았는데, 그 이유를 위 두 구절이 너무나 잘 요약한 것 같다. 둘이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거 보면, 나와 비슷한 감상을 한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내가 보기에, 한국 지식인들은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가(How the world should work)'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지만, '이 세상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가(How the world really works)'는 별로 논하고 있지 않다. 설령 논하더라도 그 수준은 별로 높지 않다. 개연성, 설명력이 떨어지거나, 근거로서 든 예시들의 사실관계가 틀려먹은 경우가 허다하다. 

'왕은 인의에 기초하여 정치를 하여야 한다',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식의 당위적인 판단으로 구성된 유교문화의 영향 때문일까.



물론 과거 한국은 빈곤과 억압으로 점철되었기에 당위적인 요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한국은 부패한 정치인, 빈곤, 독재 등의 거대악이 존재하는,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사회였으니. 그 요구를 정치인들이 받아들인 덕에 한국 사회가 이토록 발전할 수 있었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처럼 거대악도 없고, 복잡한 사회에서 당위만 운운하는 건 문제다. 당위에 사로잡히면, 사회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데 소홀해져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기 십상이다. 또 자기들끼리는 통할지 몰라도 남이 보기엔 터무니없는 도그마에 빠지기 쉽다. 이는 세상을 당위에 맞게 개선시키는 데 방해만 될 것이다. 



이제 한국 지식인은 당위를 일단 제쳐놓고, 자국을 엄밀하고 실증적인 방식으로 연구할 때가 왔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한국을 연구해볼 생각이다.  


미국 대학가의 정치적 올바름 현실 [이코노미스트 번역] 시사잡담

https://www.economist.com/news/united-states/21728688-reed-college-oregon-shows-left-v-left-clashes-can-be-equally-vitriolic-arguments

(미국) 대학가에서 표현의 자유 논쟁은 좌우 대립이 아니다

오리건의 Reed College가 보이듯 좌좌 대립도 좌우 대립만큼이나 독설적이다

오전 9시에 대학 생활의 첫 수업인 Humanities 110 강좌 강의실이 신입생들로 꽉 차있었다. 프로그램의 수장 Elizabeth Drumm은 목소리를 울려대며 몇몇 발언으로 강의를 시작했했다. 몇몇 강사들이 패널 토론이 벌어지는 곳으로 이동할 무렵, 세 시위자가 강의장 양 끝에서 출몰했다. "우리는 이 수업이 유럽중심적이기 때문에 항의합니다" 한 시위대가 말했다. Drumm은 "여기는 수업실이고 이런 행동은 부적절하다"며 즉각 강의를 취소했다. 이 행동은 Oregon의 Portland의 인문교양대학[주- Liberal Art College : 학부중심대학으로서 연구보다는 학부생들에게 교양으로서 인문학, 자연과학 등 기초학문을 가르치는 교육을 중시하는 대학들] Reed College의 다음 학기에서도 반복되었다. 


지난 학기엔 수십명의 학생들이 카드보드 사인을 들고 강의장 앞에 앉아 일주일에 세 번 열리는 강의를 계속 점령했었다. 그들은 강의안에서 비백인의 목소리가 없다면서 종종 입을 막는 퍼포먼스를 보였다. 심지어 학기 시작 전에 대안적 커리큘럼을 갖고 강의 무대에서 신입생들을 가르친 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 해엔, 학장은 강의가 시작되기 16분 전 학교의 반대 정책(dissent policy)의 윤곽이 담긴 이메일을 보냈다. 그는 이메일에서 대학 당국은 잠재적 충돌에 맞서 대응하겠다고 경고했다. Reed College 학생들은 Princeton Review's의 382개의 인문교양대학 중 가장 진보적이고(liberal) 두 번째로 공부를 많이 하는 대학교로 뽑혔다. 그런 좌파 정치와 진지한 학문의 결합은 작년에 대학 당국, 학생, 교수들을 위협하는데 힘썼음이 드러났다. 


시위대들은 인문학 프로그램에 나온 학자들이 압도적으로 남성, 백인이 많아 세계의 대단한 문명들을 무시하기 때문에 인종차별적이라고 항의한다. 그들은 흑인들이 학교의 1,400명 중 3% 미만만 차지함을 지적하고, 대학 당국이 흑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충분한 노력을 행하지 않았음을 언급했다. 그들의 목표와 전략을 뒷받침하기 위해 학생들의 적절한 비율이 등장했다. 스스로를 혼혈이고 성소수자로 정의한 조교수 Lucia Martinez Valdivia은 시위대들에게 지난 겨울에 Sappho[주: 레즈비언인 걸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 문학가]에 대한 강의 도중엔 시위를 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교수는 그녀가 PTSD로 고통받았으며, 반대에 직면하면서 강의를 전달할 수 있을지 의문만 생겨났다고 언급했다. 처음에는 시위자들은 그들은 전략을 바꾸어 검은 옷을 입고 강의실에 조용히 앉아있기로 공지하였다. 시위대들은 그녀의 강의 끝에 교수를 야단쳐 울게 했다. 


시위대들은 Valdivia 교수가 수많은 모욕의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인문학 강의안에 반대하지 않아 백인 우월주의적인 원칙들을 용인한 '인종의 배신자'였다. 그녀는 티셔츠를 입으면서 '시는 문학이다'는 흑인 속어를 도용했기 때문에 '반-흑인적'이엇다 그녀는 Trigger Warning[주- 강의중에 다루는 문학 작품에 성범죄, 인종차별, 폭력 등의 내용이 나올 때 해당  트라우마를 안은 사람들을 위해 작품에 해당 내용이 등장한다고 미리 공지함]이 성적인 트라우마를 줄일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에 '장애인 차별자(ableist)'였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학생들의 억압의 감정을 의심케 했기 때문에 '가스라이팅 시전자(gaslighter)'였다. 


그녀는 나중에 블로그에 "나는 이런 학생들에게 모욕감을 느낀다"고 토로하였다. "나는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에 대한 강의 심지어는 이런 이슈들을 언급하는 글들을 가르치기가 무섭다.. 특히 학생들이 역사성이나 객관적인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에(그들은 이런 요소들을 백인 시스[주-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젠더와 내가 생각하는 젠더가 같은 경우]헤테로[주-이성애자] 가부장제의 도구로 폄하한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이런 강의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몇 주 후, 대학은 영화에 트랜스젠더들의 동정적인 자화상을 처음 다뤘다는 사유로 널리 호평받은 "Boys Don't Cry"의 젠더-유동적인[주 - genderfluid: 고정적인 젠더에 구애받지 않고 남녀를 자유로이 오가는 성정체성] 감독 Kimberly Peirce를 초청했다. 시위대들은 그 행사를 홍보하는 포스터들을 찢어버렸고 그들의 고유 포스터를 붙였다. "시스백인 개x끼(bi*ch)는 꺼지라'고, "너의 트랜스젠더 혐오는 꺼지라"고. Peirce 감독이 말하기 시작할 때, 시위대들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소리를 질렀다. 그들이 느끼기에 그녀는 트랜스젠더들에 대한 폭력을 이용해 이득을 벌어들이고 있었고, 영화에 비-트랜스젠더 배우인 Hillary Swank를 기용했기 때문이다. 학과장 Nigel Nicholson은 이번 학기의 학생들을 "발화자를 고발하려는 질문들을 하고 있었다며, 이건 대학이 아니라 마치 재판장 같았다"며 술회했다.


이 해 초에 시위대들은 대학 당국에 흑인들을 더 많이 끌어들여 재학시키기 위해 노력을 다하라는 합리적인 요구를 하였다. 그리고는 교수들을 향한 고충을 판단하는데 학생들의 역할을 확장시키고, 대학 전반에 인종-민감성 교육을 실시하는 것을 포함한 괴상한 요구들을 하였다.



테르미도르 반동[주-프랑스 대혁명 후 등장한 혁명파 폭군 로베스피에르가 반대파에 처형된 사건. 급진세력의 오만과 독선에 온건세력이 맞선 행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 같다] 


많은 학생들은 대학이 반대되는 의견들을 표출하기 두려워지는 공간이 되어간다고 속으로 생각한다. 시위자들의 견해에 SNS로 반대하는 학생들은 운동가들에 의해 인종차별주의자로 비난받는다. 새로이 입학한 한 외국인 대학생은 그녀가 대학에 자유지상주의자[주- 경제적 자유주의, 사회문화적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성향을 가진 사람들] 모임이 없냐고 미래 동기들에게 묻자 조롱을 받았다. 백인 학생들은 다른 학생로부터 수업에서 백인들은 인종과 정체성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소리를 들어온다며 불평한다. 한 학생은 SNS에 시위자들에 반대되는 의견을 올리자, 그의 수업 동기는 그가 일하는 대학 서점에서 해고토록 하겠다며 위협했다. "의견의 표현이 제한되었고, 다른 관점을 언급하는 학생들에게는 적대적인 환경"이라고 2학년 Yuta Kato는 언급했다.


그러나 이번 학기의 Reed College엔 반혁명의 신호들이 보인다. 무슬림학 교수들은 시위자들 앞에서 강의기를 거부했고, 150명의 학생들이 듣는 수업을 나무 밑에서 가르쳤다. 몇몇 신입생들은 시위자들의 목소리를 묻히도록 소리쳤다. 한 흑인 학생은 그들을 이렇게 타이렀다. "여기는 강의실이지 시위장이 아니다. 지금은 배우려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1학년 학생들이다" 교수의 나머지 연설은 박수 소리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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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하자는 지꺼리인가? 저런 인간들이 사회 진출하면 참 볼만하겠다. 

자기의 의견만이 제일이라고 우기는 소아병 환자들이 왜 이리 많아졌냐.


정말 트럼프가 당선되도 이상할 게 없는 환경이었구나. 

Oso님 블로그에서도 봤지만, PC 문제가 정말 심각하긴 하다.


p.s. 이글루스엔 주 기능이 없어서 아쉽다. 처음 봐서는 이해가 안 될 용어가 한가득이라 주를 달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글이 지저분해 진 점은 양해 바란다.


p.s.2 번역이 어색한 건 양해바란다. 개인적으로 영어실력이 그렇게 좋진 않다.


장애인 차별에 대한 단상. 잡담

https://twitter.com/d8373b/status/943671150134960130

이 만화를 보고 장애인의 현실에 개탄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이런 차별이 발생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  


장애인을 동정하고 도와줄 대상으로만 가르쳤지, 
장애인들이 진짜 무엇을 원하고, 장애인들을 접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지 않으니.


내 경험에 따르면, 한국의 장애인 교육은 장애인을 무시하지 마라, 그들을 도와줘야 할 불쌍한 대상이다, 정도가 전부였다.


초등학교 수련회 때.
시각장애인들의 고충을 이해하기 위해 눈을 눈가리개로 가리고 동료와 걸어다니는 체험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장애인들을 끔찍한 고통을 받는 불쌍한 사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내 또래 중에서 정신적으로 문제있는 여자아이가 한 명 있었다.
무슨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능에 좀 문제가 있어보이던 여자아이였다.
아무 때나 울고,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하고. 뜬금없이 이상한 혼잣말 하고.   
그런 상황인지라서 수업할때는 특수반에 가서 특수반 교사와 활동했다.

그 상황에서도 선생이 학생들을 상대로 당부한 내용이 저 정도 수준이었다.
OO도 착한 사람이니 다가가려고 노력해라. OO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니 도와줘라. 
OO도 어떤 면에선 좋은 사람이다.
그 정도로.

장애인을 직접 접한 나도 이렇게 교육받았는데,
장애인을 접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받은 교육은 오죽했을까?


장애인들이 핸디캡이 있는 건 사실인데,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자세를 가지는게 무슨 잘못이냐고?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장애인들을 무조건적인 연민 대상으로만 보기 쉽다.
그게 문제다.
학교에서 가르친 바 없기에, 이들은 장애인들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장애인들의 고충만을 배웠기에, 장애인들의 실제 능력을 과소평가하게 된다.

그들에게 장애인들은, 그저 도와주고 불쌍히 여기면 끝인 존재가 된다.


첫번째 만화처럼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들조차 남이 하도록 하며,
세번째 만화처럼 장애인을 무조건 불쌍한 존재로 띠워주며,
네번째 만화처럼 장애인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여 과잉친절을 베푼다.

그런데 장애인들은 이런 배려(?)를 불편해한다. 
장애를 극복하려 부단히 노력하고, 일반인처럼 평범하게 대우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런식의 배려는 거추장스럽고, 자아를 부정받는 느낌일 것이다.
장애인을 위한다는 교육이, 오히려 장애인을 일반인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타자화시켜
장애인들과의 진정한 교류를 어렵게 만든 것이다.

이런 장애 교육은 위선이다.
장애인들의 실제 소망은 하나도 모르고,
무조건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기만 하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진짜 장애인들을 위한 태도가 아니다. 


물론 아직도 장애인이라고 무시하는 한심한 부류도 있다.
(저 링크의 두번째 만화에 나온 의사가 그렇다)
그리고 장애가 무엇인지 이해를 못하는 무지한 부류도 있다. 
그런 부류에겐 위와 같은 교육이 필요하다. 
예전에 장애인들을 무조건적으로 불쌍하고 도와야 할 존재로 가르친 건 그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그런 교육이 절실했으니까. 

그러나 이젠 그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장애에 대한 교육은 미흡하게나마 진행되고 있고,
현재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옛날 수준으로 척박하지는 않으니까. 


이제 우리는 장애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장애인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교육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자기만족감을 주는 장애 교육을 넘어선, 진짜 장애인들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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